[고택을 찾아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더욱 빛나는 안동 임청각臨淸閣 | |
2011-03-18 | |
![]() ![]()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고택 중 가장 규모가 큰 집으로 알려진 임청각은 예전 건물 전체가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1942년 완공된 철도 중앙선이 임청각 앞으로 지나가면서 대문간과 행랑채가 헐려나가 60여 칸 규모로 축소됐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 규모만으로도 다른 고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현재 남아있는 20세기 이전 고택 중 이 집과 규모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강릉 선교장정도가 아닐까 한다. 임청각은 1519년 이명李名 이 건립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성이씨 종회에서 발간한 임청각 소개서에 의하면 임진란 후와 1767년에 중수했다고 하는데 중수기重修記에는 1626년 군자정 단청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26년과 1769년, 두 번에 걸쳐 중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침인 임청각 구조를 보면 일부에서 고식古式구조가 엿보여 두 번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옛 구조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 임청각이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걐辭중 登東而 舒嘯굢淸流而賦詩(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읖조린다)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은 철도 개설로 낙동강과 단절됐으나 과거에는 대문이 낙동강과 붙어 있었다고 하니 임청각이라는 이름이 결코 집 분위기와 동떨어진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낙동강과 반변천半邊川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한 이곳은 지금은 도시가 확장돼 고가도로와 현대식 건물로 주변이 산만해졌지만 예전에는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택에서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집 대문을 누대걹臺로 지었는데 바로 이 누대 앞에 낙동강이 흘러 2층 이곳에서 낚시를 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집 앞 자연 풍광이 매우 수려했음을 알 수 있다. 규모뿐만 아니라 구조에서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경사가 급한 땅을 안았기에 건물들이 횡적인 배치를 하고있다. 좌측에 몸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 별당인 군자정이 있으며 맨 우측 언덕에는 사당이 배치됐다. 지금은 철로 보호막에 막혀 제 위용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과거 언덕에 수십 칸의 건물이 횡으로 배열된 모습은 대가大家로서 위풍당당함을 자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은 크게 보면 3열로 구성됐다. 경사를 따라 맨 뒤에서부터 몸채, 안행랑채, 바깥 행랑채가 —자로 놓였다. 이렇게 —자로 배치된 건물을 수직방향 날개채가 연결한다. 따라서 건물 전체는 매우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현재 남아있는 고택 중에서 이와 같은 구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임청각은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형 마당을 중심으로 각 실을 배치했다. 이런 중정형 집은 중정이 넓지 않을 경우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임청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앞쪽 안행랑채가 2층으로 지어져 답답함을 가중시킨다. 안채에서 생활하는 안주인의 입장에서는 감옥이 따로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폐쇄적인 구조다. 미관을 고려한 주먹장이음, 이곳이 유일해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은 月자 형태로 만든 정침이다. 이러한 구성은 화성 정용채 가옥과 임청각 두 곳뿐이다. 독특한 구조 때문에 임청각 평면 형태를 문자형文字形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부분 용用자 형으로 이야기하나 日자와 月자를 합친 것이라 해석하는 이도 있다. 폐쇄적인 구조라지만 집은 매우 튼실한데 안정감을 느끼게 할 만큼 넉넉히 사용한 부재가 인상적이다. 안채를 보면 민도리집이지만 보를 받치는 동자주가 포형동자주로 아름답게 초각돼 있고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도 매우 화려하다. 매우 공력을 들인 집임이 틀림없다. ![]() 일반적 공법에서 벗어나 까다로운 주먹장이음을 택한 것은 미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장연과 단연을 엇갈려 배열할 경우 내부에서 올려다보면 중도리를 중심으로 장연과 단연이 엇갈려 배치돼 가지런한 느낌이 감소되기 마련이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임청각은 다른 집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서까래 연결법은 지금까지 본 고택 중 이곳이 유일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상룡 선생을 낳다 주목 받는 또 다른 곳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쪽에 위치한 방이다. 앞마당에 우물이 있어 우물방으로도 불린다. 종중 안내책자에는 산청産廳(임부들이 태교 및 해산을 하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상룡 선생, 외손外孫문헌공 등 정승 3명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곳이 잠시 산청으로 쓰였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임청각의 배치로 보아 사랑채로 쓰였던 곳이 아닌가 한다. 정침 옆에는 별당이자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철도로 잘리고 콘크리트 건물로 혼탁해졌음에도 지금도 마음을 확 뚫리게 한다. 왜 이곳에 군자정을 지었는지 한눈에 이해가 될 정도로 빼어난 조망을 지녔다. 동쪽 네 칸 대청 옆에 —열로 4칸의 방이 배열돼 전체적으로는 ㅏ자 형태 평면이다. 그러나 대청과 방 네칸의 구조가 다르다. 대청은 쇠서(전각 기둥 위에 덧붙이는,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가 없는 물익공으로 된 이익공구조에 팔작지붕이고 방은 민도리 삼량집이다. 왜 이렇게 구조를 달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한 누마루에 단아한 맞배지붕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 * 임청각은 보물로 지정된 물질적 가치보다 일제 강점기에 고성 이씨가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더욱 빛나는 집이다. 우리가 서예의 가치를 단순히 잘 썼다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글쓴이의 인품과 더불어 고려하는 것처럼 집의 그것도 살았던 사람과 연관지어 판단해야 한다.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호연지기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이런 경관을 바라다보고 살아온 석주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모든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생애를 독립운동에 바쳤다. 집이 지닌 가치는 그냥 드러나지 않는다. 그곳의 내력과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읽힌다. 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 ![]() ![]() < Country Home News > |
|
-
[고택을 찾아서] 수려한 경관을 담은 우복종택愚伏宗宅, 2층에 온돌방을 드린대산루對山樓
우복동천이라고도 불리는 우복종택愚伏宗宅(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 시도민속자료 제31호)은 우복 선생이 38세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7년간 거처하던 곳으로 영조 때인 1750년 전후에 다시 지어
2011-02-18 -
[건강한 집] 단열 성능을 높여 따뜻한 진주 141.9㎡(43.0평) 단층 경량 철골 황토집
채광과 조망을 고려해 최대한 북쪽으로 밀어올린 단층 황토집이다. 아파트에 살던 건축주는 건강을 고려해 황토집을 계획했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게르마늄이 첨가돼 건강성이 한층 향상된 자재(게르마늄 황토
2011-02-18 -
[편리한 집] 나이를 생각해 편리하게 지은 칠곡 125.4㎡(38.0평) 단층 목구조 황토집
집은 거주자 특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그에 맞는 기능성을 띠게 된다. 건축주 직업, 나이, 가족 구성원, 취향 등에 따라 집은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변모하기 마련이다. 칠곡 125.4㎡(38.0평) 황토집은 나이 지
2011-02-18 -
현대 주거의 실용성과 한옥의 정감을 담은 민도리집 _ 여주 황토집
마을 내에서 전통 한옥의 단점은 다른 건물과 어우러지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인흙건축에서 지은 이 현대 한옥은 모던 주택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한다. 평당 단가로 따지면 건축공사에 600만~700만 원 들어
2010-12-01 -
원시적 본능 자극하는 돌집Stone House
단양에 위치한 보현사가 스님들이 거주하고 수양할 장소를 마련키 위해 돌집을 짓고 있는 현장을 찾았다.두께 60㎝에 달하는 무거운 돌이 겹겹이 쌓여 벽체를 이루고 흙이 그 틈을 메워 하나의 건축물이 되어가는 중
2010-12-01
-
[고택을 찾아서] 고려 후기 화려한 장식미를 그대로 간직한 안동 소호헌 安東蘇湖軒
안동 소호헌安東蘇湖軒(보물 제475호/경북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길 2)은 조선 시대 지어진 건물이지만 고려 후기의 장식미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일찍이 1968년 보물로 지정됐다. 소슬합장
2012-04-30 -
[고택을 찾아서] 북으로 문을 낸 북비고택北扉故宅
북비고택北扉故宅(도지정 민속문화재 제44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은 한개마을에서 충절의 표상이라 일컫는다.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북으로 문을 내고 매일
2012-04-09 -
[고택을 찾아서] 성주 한개마을 첫 번째 이야기 -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걸으니 마을이 조근조근 말을 건네더라
선조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마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성주 한개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은 그중 하나다. 2007년이 되어서야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마을 안에 있는 많은 고택들로
2012-01-18 -
[고택을 찾아서] 연못이 건물 전체를 망쳤다? 달성 도곡재 達城 陶谷齋
조선 정조 2년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사용하다 20여 년 후 박종우가 공부방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도곡재陶谷齋(시유형문화재 제32호/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로 불리고 있다. 용도와 주인이 바뀌면서
2011-12-07 -
[고택을 찾아서] 싸리기둥에 칠기봇장 달성 조길방 가옥達城 趙吉芳 家屋
대구 달성 조길방 가옥達城趙吉芳家屋(중요민속문화재 제200호,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350)은 가화를 당한 조광국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안채를 지었고 나머지 건축물은 그의 아들, 손자 대에 올렸다. 싸리 기둥
2011-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