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담긴 선線의 아름다움, 최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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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담긴 선線의 아름다움, 최형일 · 배미녀 부부의 정원

2010년 9월 17일 (금) 15:03:06 | 지면 발행 ( 2010년 8월호 - 전체 보기 )

"난 자신 없어. 내 손에만 들어오면 식물이 다 죽어버리거든." 10년이 넘는 세월을 식물과 동고동락同苦同樂하다시피 한 배미녀씨가 주변인들로 부터 가장 듣기싫은 소리 중 하나다. "두려움을 떨치고 관심을 가져라"고 조언하지만 웬만해선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형일 · 배미녀 부부의 정원을 찾아가 보니 주변에서 엄살 어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정원처럼 가꾸려면 한두 해 공을 들여서는 '택'도 없을 터, 애초 난 못한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게 편할 것도 같다.

글 한송이 기자 사진 송제민 기자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리는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은 한적한 동네의 평범한 빌딩 앞. 주위를 빙빙 돌아봐도 미리 접한 사진 속 최형일 · 배미녀 씨 정원은 도저히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었는데, 놀랍게도 그 평범한 빌딩이 목적지란다. 부부의 정원은 바로 이 빌딩 뒤쪽에 꼭꼭 숨어 있다. 마치 미로를 탐험하듯 계단을 올라 복도 덱을 따라가면 자연의 깊은 울림이 담긴 장엄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방이 짙은 녹색으로 뒤덮여 있고 연륜이 느껴지는 노송의 휘어진 줄기와 잎사귀들의 위엄에 절로 감탄이 새어나온다.
처음부터 정원이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수풀로 우거졌던 이 공간은 베란다를 온실로 꾸민 것을 시작으로 차츰 변화했다. 또한 취미로 분재를 배우면서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식물을 바라보게 됐다.
"보통 나무를 볼 때 전체적인 모습과 색채로 아름다움을 판단하잖아요. 그런데 분재를 배우면서부터 줄기와 가지 하나하나가 지니는 선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이 선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려면 세월이 필요하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식물을 가꾸는 사람에겐 필수 덕목이기도 해요. 그래서인지 우리 집 식물에는 유난히 굴곡과 선이 많아요. 여기에 10년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죠."

뒷마당엔 비밀스런 정원이
"협소한 공간은 인위적으로 꾸밀 수밖에 없어요." 배 씨는 넓은 정원은 자연스럽게 꾸며도 집과 조화를 이루지만 작은 공간을 그렇게 방치했다가는 자칫 난잡하고 정리가 안 된 정원으로 보이기 십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원에는 공간 활용이 뛰어난 화분이 많고 자투리 공간을 정원으로 끌어들인 아이디어도 다양하다. 후정과 맞닿은 외부 녹지가 정원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노력 끝에 얻은 결실 중 하나다. 잔디로 채웠던 마당은 얼마 전 덱을 깔아 정원 관리를 용이하게 하고 외부 녹지로 이어지는 경사지에는 암석을 쌓아 올렸다. 바로 이 암석 위가 정원의 주요 일터. 말발도리, 미스김라일락, 비비추, 제주식물 등 각종 나무와 야생화로 사계절 풍성하고 키 작은 나무들도 암석 위에서는 거목巨木같은 웅장함을 뽐낸다.
정원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곳은 마당 한가운데 그늘을 만든 산수유나무와 우측 담벼락에 시공한 폭포. 산수유나무는 수형이 소나무 못지않게 아름답게 자랐고 이 나무를 심은 후부터 좋은 일이 생겼다 해서 부부에겐 '복나무'로 불린다. 청량감 물씬한 화산암 폭포는 조형미가 뛰어나고 도시의 상징인 콘크리트벽을 자연의 산물로 덮음으로써 그 정취가 배가되는 효과를 얻었다.

작은 숲 온실과 테라스 분재 정원
작은 숲을 이룬 베란다 온실이 압권이다. 정원의 시초가 된 온실은 10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온전히 부부의 땀과 정성으로 일군 곳이다. 유난히 크고 작은 화산암이 많은 까닭은 화산암에서 특히 식물이 잘 자라기 때문. 이는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산지식이다. 부부는 실패를 통해 하나이상의 노하우를 얻었다. "식물이 죽으면 왜 죽었는지 원인을 찾으면 되고 그 원인을 찾다보면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나만의 노하우가 생긴다"고 정원 관리 비법을 전했다.
현관 앞 테라스에는 작은 분재들이 진열돼 있다. 배 씨가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 분재가 테이블을 에두르며 늘어섰는데 모퉁이 화산암 위로 난 소나무 분재가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솜씨를 짐작게 한다. 담벼락 위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마삭줄, 백화등, 물안개 등 자그마한 분재들도 그녀의 섬세한 손길로 아름다운 선과 색을 갖췄다. 음악을 좋아하고 차[굮]를 즐기는 부부에게 분재는 청각, 미각 외에 시각적으로 일상에 활력소가 된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정원과 관련된 모든 일들이 부부에겐 삶을 윤택게 하는 행위가 되기에 이들은 오늘도 기꺼이 달콤한 노동에 매달린다.